한겨울 인도 위에 쓰러진 사람
이십 년 전 한겨울 새벽,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술기운에 발걸음이 비틀거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인도 위에 한 사람이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죠.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자라처럼 오리털 파카 모자 속으로 고개를 최대한 파묻은 상태로 걷고 있었는데, 사람 한 명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있었던 거에요!
'저러다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하지만 저의 발은 그 자리에서 멈추었고, 이내 그대로 뒤로 돌아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려움이었을까요, 아니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었던 걸까요. 둘 다였어요. 죄책감과 공포에 심장이 두근두근 했던게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다행히도 그 사건 이후 동네에서 누군가 얼어 죽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모르죠. 그날의 기억은 주기적으로 찾아와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특히 추운 겨울날이면 자주 떠올랐습니다. '그때 내가 그 사람을 구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단 몇 분만이라도 발걸음을 돌려 그분의 상태를 확인했더라면, 119에 신고라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계속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이런 순간들이 있나 봅니다. 잠깐의 망설임이 평생의 후회로 남는. 그날 밤 제가 보였던 차가운 무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제 마음속에서 녹지 않는 얼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곤 결심했죠. 언젠가, 다음에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도와주어야겠다고요.
차 안에서 울려퍼진 비명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 날도 별일없던 평화로운 밤이었죠. 차도 옆을 걸어가는데, 길가에 세워진 차 안에서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가 언성을 높이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심하게 싸우네'라는 생각을 하며 지나쳐 갔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들려온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었습니다.
그 순간 몇 년 전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한겨울 밤 인도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그때의 저.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직접 다가가기는 겁이 나고 다리가 떨려서, 주저하는 손으로 112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네, 여기 도로변에 차가 한 대 서있는데요... 안에서 부부가 심하게 다투는 것 같고... 방금 여자분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멀찍이 서서 차량을 지켜보며 혹시나 더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을지 가슴을 졸였죠. 놀랍게도 3분도 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몇가지 심문을 하는듯 하더군요. 그리더니 곧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장 확인해봤는데요, 단순 부부싸움이었고 큰 일은 없었습니다. 신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동시에 허탈감이 밀려왔습니다. '괜한 신고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20년 전 그 밤의 죄책감을 씻어내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나봅니다. 누군가의 생사가 걸린 순간을 그냥 지나쳤던 그날의 무거움을, 단순 부부 싸움 신고 하나로 위안을 삼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서귀포에서 피어난 행동
시간은 흐르고 흘러 따뜻한 오후 햇살이 비치던 그날, 운명은 저에게 세 번째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내와 여행을 떠나 서귀포의 한적한 도로를 달리던 중이었죠. 남원에서 서귀포 시내로 향하는 시골길, 문득 오른쪽으로 난 경사진 샛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쓰러져 계신 한 할아버지를 발견했지요.
"방금 샛길에 할아버지가 쓰러져 계셨어!"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차는 이미 샛길을 지나쳤지만, 그대로 유턴을 해서 되돌아갔습니다. 아내는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재빨리 현장에 도착해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뛰어내려 할아버지께 달려갔죠. 호흡을 확인하고 말을 걸어보니 의식은 있으셨지만,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말씀도 어눌하셨습니다.
즉시 119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조심스럽게 길가로 옮기고 손을 잡았죠. 실제로는 앰뷸런스가 5분도 안 돼 도착했지만, 그 시간이 마치 1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계속해서 할아버지께 말을 걸며 의식을 확인했는데, 그 힘든 상황에서도 할아버지는 오히려 저를 걱정하시며 "미안하다", "괜찮다"를 반복하셨습니다. 나중에 꼭 보답하고 싶으니 연락처를 달라고도 하셨는데, 지금은 치료가 우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갑자기 쓰러진 본인도 경황이 없으셨던거지요.
구급대원들이 도착해서 신속하게 할아버지를 이동 침대에 눕히고, 저에게는 상황 설명과 연락처를 물어보았습니다. 곧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앰뷸런스는 병원으로 향했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무사하시다고, 더운 날씨에 일시적인 혈압 상승으로 실신하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20년 전부터 제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그 무거운 죄책감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야 진정으로 그날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저와는 달리, 이번에는 주저 없이 달려갈 수 있었으니까요. 쓰러진 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요. 아내는 그날 저를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저는 드디어 오래된 마음의 빚을 조금은 갚은 것 같아 홀가분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