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카페나 식당에서 욕설과 비속어를 듣곤 합니다. 술이 들어가는 장소일수록 더욱 듣기 쉽습니다. 과거에 비해 공공장소에서 욕설과 비속어가 자주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 다수가 10~30대로 보였습니다.
2011년도에 발행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보도에 따르면 학생들의 욕설 사용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욕설과 비속어를 죄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며, 욕설 문화가 일상화됐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인터넷 사용을 꼽았습니다. 이 보도 속의 학생들은 현재 모두 성인이 됐습니다. 앞선 제 경험이 근거 없는 일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요즘은 간혹 초등학생들이 욕하는 걸 듣는데, 그럴 때면 깜짝 놀랍니다. 제가 초등학생일 때는 누굴 때릴지언정 욕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폭력보다 욕설이 더욱 금기시됐죠. 그런데 초등학생들의 욕설과 비속어가 목격되는 것으로 보아, 더 이른 나이에 이러한 언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학부모와 교육자들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버릇이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 사용하기 적절한 말 같습니다. 그런데 이는 기원전 1700년경 수메르인들의 점토판에 기록된 말입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신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비판은 시대를 초월하는 일 같습니다.
우리는 욕설과 비속어는 나쁘다고 배워왔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주 사용됩니다. 사람마다 정도와 빈도의 차이가 있겠지만요. 우리는 나쁜 언어를 왜 사용할까요?
꼭 나쁘기만 할까?
첫째,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용합니다. 짜증 나거나 어려운 상황에 욕하면 후련함을 느끼곤 합니다. 입 밖으로 욕을 꺼내기 어려운 상황에는 마음으로 악을 지르며 욕합니다. 이는 카타르시스의 일종으로 드라마나 영화 같은 매체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극에서 주인공이 악역에게 욕으로 한방 먹여줄 때 관중들은 통쾌해하지요.
둘째, 감정을 더욱 자극합니다. 환희, 슬픔, 절망 따위의 감정 표현을 강렬하게 만들 때 효과적입니다. 또한 창의적으로 사용하면 재밌기까지 합니다. 욕설은 느와르 장르의 묘미입니다. 또한 SNL, 인터넷 방송과 유튜브 컨텐츠에서는 욕설과 비속어를 사용하며 웃음을 자아내곤 합니다.
셋째, 사회적 유대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막역한 사이에 욕설은 용인되며, 이는 친함의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앞서 본 보도자료에 따르면 학생들은 친구들과 유대관계 때문에 욕설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저희 아버지는 예를 차릴 때는 점잖으시지만 사실은 굉장한 욕쟁이십니다. 아버지의 시원하고 독창적인 욕에 가족과 주변 지인들은 빵빵 터집니다.
욕설과 비속어를 장려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기능을 보면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일까요?
문제의 본질
여러 언어에는 격식과 비격식의 구분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어는 그 구분이 명확합니다. 나와 마주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적절한 표현 형식이 규범으로써 자리 잡고 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 나보다 연배가 높거나 상급자 앞에서는 그 관계에 적절한 형식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지요.
그런데 형식만 잘 지키면 되는 걸까요? 다음 예시를 보시죠.
비격식: “네가 뭘 알겠냐? 무식한 놈”
격식: “경험이 매우 부족하신 듯하군요. 이런 복잡한 내용을 이해하시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후자는 격식을 차려 말한듯하지만, 상대방을 무시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X발” “미X놈”
각 단어에서 한 글자를 ‘X’로 바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게 무슨 단어인지 바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XX”나 “XXX”처럼 모든 글자를 ‘X’로 가려도, 방송에서 “삐—” 처리를 하더라도, 우리는 맥락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글자와 소리를 가리더라도 가려지지 않는 무언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표면적인 단어의 모습이나 소리만이 아닙니다.
형식을 넘어선 이해
진정한 언어의 순화는 단순히 표면적인 글자나 소리를 바꾸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내면, 즉 마음가짐과 태도의 변화를 동반해야 합니다. 이는 욕설과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넘어, 상대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가령 누군가 내게 욕하며 화를 내더라도 “어휴 저속해”, “어쩜 저렇게 무례할까”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대신, “얼마나 답답하길래 저럴까?”하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대의 공격에도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공격적인 말 속에 가려 흐려져버린, 전달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속삭임에 귀기울이는 일 입니다.
우리가 욕설, 비속어, 비격식과 격식과 같은 형식 너머에 귀 기울인다면,
비로소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선배의 질책에 담긴 기대를
애인의 짜증에 담긴 애정을
부모의 잔소리에 담긴 걱정을
아이의 반항에 담긴 열정을
🦒 당신이 어떤 사람이던 좋아요. 진실한 모습에 다가서는, 이태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