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휴직을 한지 이제 벌써 9개월이 되어갑니다. 1년이란 기간이 길게 느껴졌었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가버리고 있네요. 가을 바람이 슬슬 차가워지던 10월 무렵에 문득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회사를 다닐 때는 분위기상 절대 기를 수 없었거든요. 휴직 기간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평상시 수염이 멋진 사람들을 동경하기도 했구요.

생각해보면 몇년 전 아들이 태어나 출산 휴가를 받았을 때 잠시 길러봤던 적은 있었지만 뭔가 부족함을 느꼈었습니다. 멋진 수염이 되기엔 2주는 너무 짧았으니 이번엔 본격적으로 츄라이 해보았습니다.

오늘은 세 달 동안 수염을 기르며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요. 엉뚱하다구요? 분명 재미있기도, 의미있기도 할거에요.

수염을 통해 본 내 모습과 주변의 반응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제 인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꼈어요. 20대 때는 수염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수염이 늘어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수염숱이 많았던 것인지 모르겠네요. 한 달 넘게 수염을 기르니 거지존을 지나 꽤나 빽빽하고 길게 자랐습니다. 특히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니 중앙아시아 다게스탄인이 한 명 서 있더라고요. 신선한 충격이었죠.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멋지게(?) 변한 제 모습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족은 아니었어요. 아내는 점점 덥수룩해지는 제 얼굴을 보며 매일 고기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어린 아들은 아빠의 수염이 웃기다고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어요. 반면, 남자인 친구들과 동료들은 수염이 멋지다, 예쁘게 난다며 호평해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요. 역시 수염은 남자들끼리만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좋게 봐주는 내 편(?)이 있다는 점에 안심했답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같은 개념?!

수염이 일쩜오센티미터를 넘어가니 새로운 사실 두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수염이 길어지면 그 주변의 피부는 두피와 같이 피지가 생기기 쉽다. 두 번째는 일정한 길이의 수염을 유지하려면 도구가 필요하다는 점이었어요.

일단 피부 관리는 두피와 비슷하게 관리를 해주어야 했어요. 머리 며칠 안감으면 간지럽잖아요? 그런데 수염이 난 턱주변도 마찬가지더라고요. 머리를 감을 때 머리카락만이 아닌 두피까지 잘 씻어주어야 하듯이 턱주변도 피부를 중심으로 관리를 해주었습니다. 머리 감듯이 수염과 피부도 정성껏 샴푸(!)로 감아주었어요. 그러니 피지로 인한 피부 트러블도 싹 사라지더라고요. 이 일을 겪어보니 문득 머리카락도, 수염도 같은 털이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길이가 낭낭해진 수염도 미용실에서 머리 깎듯이 관리해야 한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쪽가위로 관리가 가능했지만 이게 길어지니 쉽지가 않더라고요. 생각보다 숱도 많아서 가위질 한 번 잘못하면 엉뚱한 수염이 깊게 잘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수염용 클리퍼(바리깡)를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추가 어댑터를 사용하면 23mm까지 일정하게 자를 수 있기에 수염 관리의 신세계가 열렸지요. 물론 바버샵 같은 곳에서 주기적으로 관리를 받으면 더 좋겠지만 그건 저에겐 너무 비싸더라고요. 일정한 길이로 관리만 해줘도 훨씬 더 깔끔하게 보였습니다.

수염을 통해 발견한 나만의 스타일

수염을 기른지 세 달이 가까워지니, 이런 저런 스타일 시도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저와 잘 어울리는 수염 스타일이 뭔지 알게 되었죠! 정확히 말하자면 저에게 가능한 스타일이 뭔지 확실히 알게 되었어요. 위의 그림을 보시면 수염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구렛나룻, 콧수염, 턱수염이죠. 그리고 이 세 개의 풍성함과 자연스러운 연결이 남성미(?) 넘치는 수염 스타일을 만든다고 생각했죠.

턱수염은 풍족하니 일단 구렛나룻 연결을 시도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길러봐도 한쪽은 턱쪽과 연결이 되는 반면 다른 한쪽은 연결이 안되었죠.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어요. 그 다음엔 콧수염이었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입꼬리부터 턱수염까지의 수염숱이 적어서 연결이 안되더라고요. 게다가 턱수염에 비해 콧수염은 숱이 적어 밸런스가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콧수염 연결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수염을 통해 깨달은 것

여러 실험을 거친 끝에 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았어요. 이 과정에서 문득 깨달은 게 있더라고요. 어떤 일이든 겉핥기식 접근으로는 진정한 매력이나 가치를 알 수 없다는 거였죠. 처음엔 단순히 '한번 길러볼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본격적으로 관리하고 스타일링해보니 제가 좋아하는 모습과 관리 방법을 찾을 수 있었거든요. 본격적으로 수염을 기르기 전까진 전혀 알지 못하던 세계였죠!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제가 생각했던 멋진 수염 스타일과 실제 제게 어울리는 스타일이 달랐다는 점이에요. 처음엔 구렛나룻부터 턱수염까지 풍성하게 연결된 스타일을 꿈꿨지만, 결국 턱수염만 깔끔하게 유지하는 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됐죠. 이런 경험은 단순한 수염 관리를 넘어서 삶의 여러 영역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될 것 같아요.

풍덩 빠져봅시다

요시노 겐자부로의 1930년대 저서인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주인공의 외삼촌은 조카에게 편지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 이건 경험을 통해 온다."

수염을 기르는 동안 아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고, 아들은 웃기다고 했고, 친구들은 응원해줬죠. 이런 열렬한(?) 반응 속에서도 제가 원하는 모습을 찾아갈 수 있었던 건, 직접 경험하고 시도해봤기 때문이에요.

샴푸로 수염을 감고, 클리퍼로 길이를 다듬으며 깨달은 게 있어요. 수염은 단순한 털이 아니라 제 정체성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거예요. 더 이상 출산휴가 때처럼 잠깐의 시도가 아닌, 제 모습의 일부가 된 거죠. 앞으로도 이런 자세로 새로운 도전들을 이어가보려고 해요. 때로는 실수도 하고,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이제 3월이 되면 휴직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게 되어 아쉽게도 수염과는 작별해야 해요. 휴직 기간의 특별한 동반자였던 수염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조금은 서운하네요. 하지만 수염을 통해 배운 교훈은 계속 제 곁에 남아있을 거예요. 새로운 도전 앞에서 망설일 때면, 수염을 기르며 느꼈던 설렘과 발견의 기쁨을 떠올리려 해요.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 발끝만 살짝 담그는 수준이 아닌, 온몸을 풍덩 담그는 자세로 도전해보려 합니다. 그게 수염을 통해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니까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수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