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모니터 화면에서 손오공이 에네르기파를 쐈어요!

손오공이라고는 했지만 선으로만 엉성하게 그려진 그래픽이었어요. 캐릭터 그림은 딱 두 개뿐이었죠. 서 있는 모습과 쏘는 모습. 하지만 저는 기절할 것 같았어요. 이렇게 멋진 코드를 본 적이 없었거든요.

"형 형!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놀란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J 형이 말했어요.

"멋지지? 너도 배우면 만들 수 있어."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어요. 같은 아파트 15층에 살던 J형이 286 컴퓨터를 선물로 받았대요. 그 소식에 저는 그날부터 뺀질나게 형네 집을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했어요. 컴퓨터도 궁금했고, 게임도 하고 싶었거든요!

방학 때가 되면 거의 하루 종일 형네 집에 있었어요. 페르시아의 왕자, 삼국지 시리즈, 위험한 데이브 등등 정말 많은 게임을 함께 했죠.

그런데 형은 게임만 하지 않고 가끔 이상한 걸 하더라고요. GW-BASIC이라는, 1980~90년대 컴퓨터에 기본으로 깔려있던 프로그래밍 언어였어요. 초록색 글씨가 검은 화면에 떠올랐어요. 형은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했고, 그러다 엔터를 누르면 컴퓨터가 멜로디를 연주했지요.

그리고 어느 날, 형이 제게 보여준 게 바로 그 손오공이었어요. 당시 초무투전이라는 드래곤볼 게임이 유행이었는데, 형이 베이직으로 손오공의 모습을 선으로 그리고 스페이스바를 누르면 장풍이 나가게 만든 거예요.

충격적이었어요.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였거든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저는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컴퓨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형처럼 PC로 멜로디를 연주하고, 그래픽이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저도 나름 열심히 배우긴 했지만 형처럼 움직이는 캐릭터는 만들지 못했지요.

형은 저에게 참 많은 것을 보여주었어요. 새로운 컴퓨터, 소프트웨어뿐만이 아니었죠. 당시 우리 동네가 생활 반경의 전부였던 저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옆동네 게임샵에 간 적도 있었어요. 새 패키지 냄새가 가득한 게임샵에서 게임을 사고, 지하에 있는 떡볶이집에서 같이 간식을 먹었어요. 형과 같이 있으면 제가 마치 어른이 된 기분이었죠.

이렇게 시간이 지나며 저는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을 좋아하고, 못 먹었던 매운 떡볶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났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 같았던 J형은 제가 중학교 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어요. 그렇게 연락이 끊겼습니다. 당시 우리에게는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었으니까요.

그로부터 25여 년이 지난 30대 중반, 저는 컴퓨터 과학 전공으로 학사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코딩은 취미로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저도 모를 갈증을 느꼈었거든요. ROI를 고려하지 않은 순수하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였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컴퓨터의 기초 수학부터 회로, 프로그래밍 언어의 원리까지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크나큰 행복감을 얻었습니다. (저 변태 아니에요!)

그러다 졸업 후 '내가 어쩌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지' 하며 반추하다 보니 J형이 생각나더라고요.

돌아보니, J형이 좋아했던 것들이 '그대로' 제 취향이 되어 있었어요. 생각은 여기에서 이어져 다른 제 취향과 경험을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좋아하는 것들은...

• 클래식 음악은 아버지 덕분에,
• 보드 게임은 사촌형 덕분에,
• 보드는 토마스 덕분에,
• 베이스 기타 연주는 베프 덕분에,
• 지식관리는 요한님 덕분에,
• 커뮤니티는 위쯔님과 크릿님 덕분이었죠!

이런 생각을 하니 꽤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총합이라는 걸요!

좋아하는 사람들을 닮아가는 건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성장이라 생각해요. 좋아하는 사람들이 열어준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제 세계의 경계선에서 한 발 밖으로 나아가야 하니까요.

멋지지 않나요? ☺️

저는 일본 밴드 SPITZ의 "大好物(다이코우부츠,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는 뜻)"이라는 노래를 아주 좋아해요. 특히 가사 중 아래 구절이 완전 제 취향이거든요.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내일이면 나도 좋아하게 될 거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까지 좋아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잊지 않고 살 거예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총합이라는 걸요.

여러분의 J형은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