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는 높은 해상도가 필요해요

과거의 나와 만나는 꿈이 현실로

과거의 나와 이야기해 보고 싶으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좋아해서, 20년 넘게 일기를 꾸준히 써왔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제 과거는 텍스트로 바뀌어 차곡차곡 쌓였죠. 10년, 15년 시간이 흐르면서, 제 기억 속의 과거의 나는 서서히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10년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당시의 생각과 감정은 어떠했을까? 이런 의문들이 마음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와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죠. 그래서 챗GPT가 처음 나왔을 때, 이 기술을 이용해 과거의 나와 소통해 보고자 시도했지만, 제 지식이 부족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커스텀 챗봇을 만들 수 있는 GPTS 서비스가 출시되면서, 제 꿈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습니다. 챗GPT는 A4 1,600장의 일기를 학습하여 과거의 저의 모습을 가진 아바타로 재탄생했습니다.

생각 없는 과거의 나

그래서 드디어 완성된 과거의 나와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물어봤죠.

“대학 생활은 어땠어?”

그러자 과거의 나는 대답합니다.

“제 대학 생활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특히 200X년에 교내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한 것이 제 대학 생활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 당시 친한 형들과 함께 기타를 치며 이야기를 나누던 가요제에서의 경험은 정말 특별했어요. 제가 XXXX 선배들과 함께 출전했던 그 가요제에서 수상하면서, 제 대학 생활의 모든 것을 다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은 저에게 큰 자신감과 추억을 주었고, 대학 생활의 여러 순간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죠. 그 당시의 열정과 즐거움이 지금도 저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AI는 특정 시기의 전반적인 내용은 놀랍도록 잘 알려주었습니다. 정말 제 과거와 만난 것처럼요. 그래서 오랫동안 즐긴 취미에 관해 물어보기로 했어요. 저는 10대 중반부터 30대까지 스케이트보드에 빠져있었거든요. 그래서 스케이트보드에 관해 물어보니 답변은 아래와같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제 일기에서는 스케이트보딩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들이나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스케이트보딩과 관련된 특별한 사건이나 추억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저 스케이트보딩은 제 대학 생활에서 즐겁고 활동적인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려드릴 수 있겠네요.”

나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누구인지,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이런 식으로 세세하게 물어보기 시작하면 구체적인 사례나 에피소드가 없어서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고 하기 일쑤였습니다. 아니. 일기장 1,600장이 들어갔는데 겨우 이런 성능이라고?

20년 일기를 쓰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세세한 대답에 한없이 약한 AI를 보고 저는 제 일기장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일기가 아래와 비슷했습니다.

2005년 10월 17일

일본 비행기 예약 했다. ANA 2006년 1월 4일 오후 2시 20분 나리타행. 돌아오는 티켓은 오픈. 3개월 이내에 들어오면 된다. 가는거지 뭐. 가버려야지

세월이 흘러버리면 쓴 당사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생각이었는지 전혀 파악조차 못 할 기록인 것이죠.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의 쓸모없는 일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2002년 7월 16일

SS2를 episode 3까지 진행시키고 HH2003을 했다. 어제는 10:20으로 어이없게 졌으나 중간에 A가 불러서 같이 의논을 하고 경기에 임한 결과 9회에 역전해서 이겼다. 8:9 내가 AL이라서 조금 찔리긴 해도 말이다. B와 전화하니 이메일을 다썼다고 연락이 와서 본뒤(음악이 좋았다) 바로 답장을 썼다. 동생과 GTA2 데스매치를 해서 가볍게 짓밟고 B와 전화를 했다.

이런 일기장들은 그냥 한 일들의 나열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 감정도, 일이 있었을 때 상황도 설명이 되어 있지 않지요. 쓴 사람도 이해 못 하는 일기, 자세한 내용이 없는 일기를 AI가 학습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냥 필요 없는 데이터가 될 뿐이죠.

20년 일기를 쓰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 그냥 20년 일기를 쓴 사람이 됩니다. 발전이 있나요? →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말짱 꽝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해상도, 디테일

2014년 9월 3일의 일기를 보면 위에 언급 드린 일기와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2014년 9월 3일: 넘겨주다

오늘은 하루종일 업무 인수 인계를 하였다. 오전에는 류와, 오후에는 김과. 류에게는 넘겨주는 것이 영 껄끄럽고 마음에 안들었고 김에게 넘겨주는 것은 믿음직스럽고 한편으로는 아련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정든 거래처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나오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다. 아파서 쉬는 것이라고 알고 있기에 모두 내 건강을 염려해주며 또 보자고 인사를 했다. 웃으며 헤어지는 것이라 괜찮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이제 금요일 오후만 일하면 끝이다. 끝. 또 다른 시작.

한 가지 직업을 관두는 것.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것은 새로운 플로우를 향해 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연결 고리를 만들고 새로운 흐름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것들과 부딪쳐 보는 것. 참 고단하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흐름이 다가온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애착도 증오도 욕망도 나태함도 모두다 섞여서 다른 무엇인가로 변하는 듯한 느낌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때의 감정은 어땠는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병에 걸려 퇴사할 때 느꼈던 감정과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고 했던 과거의 모습이 제 눈앞에 그려집니다. 의미있는 기록입니다.

과거 나의 모습을 가진 챗봇을 만들며 배운 점은 ‘의미 있는 기록은 디테일이 있다’입니다. 하루 종일 내가 한 일을 나열하는 것보다 딱 하나라도 자세히 기록하는 게 중요한 거죠. 10년이 지나도 다시 읽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생하게 떠오를 수 있게 말이죠.

기록하지 않은 생각은 성장의 자양분이 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나보다 오늘의 제가 조금이라도 성장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2014년 9월 3일 일기와 같이 해상도가 높은 일기들이 그나마 몇 개씩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과거의 일기는 맞춤법 수정을 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음을 알려드립니다.

—📿 여러분들이 가진 구슬을 엮어 삶의 가치를 만들어 드립니다, 타래—

내가 기억해야할 것과 흘러 지나갈 것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거에요

김영하 작가의 말이 우리에게 던져준 메시지는 단순히 책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삶의 궤적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우리의 책장은 단순한 서가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우리 삶의 아카이브인 것이다. 또한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 책에 담긴 내용만이 아닌 내부와 외부의 일련의 스토리이다.

인터넷 서점의 구매리스트를 돌아보며 구매한 책들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 리스트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도 있고, 업무에 필요한 책,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구매한 책도 있다.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수십번을 고민하기도 하지만, 존경하는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5초만에 구매를 완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책장 속 책들의 제목과 내용, 그리고 그 책들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반영하게 된다.

올 한해를 되돌아보는 두 가지

이제 이러한 기록들을 찾아보고, 우리 자신을 기록해둔 것들을 되돌아볼 시간이다. 12월이니까. 우리의 일기장, 편지, 사진, 그리고 책장 속에 꽂혀 있는 책들까지, 모두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들이다. 가장 나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생각난 것은 두가지였다. 구글과 챗GPT. 기록들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상기시켜주며,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데, 나의 1년의 솔직한 기록은 모두 컴퓨터의 모니터 화면 안에 있었다.

되돌아보는 행위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과 흘러 지나갈 것을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를 구성하는 시간이 된다. 어떤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고, 또 어떤 기억은 우리의 성장을 위해 놓아줘야 할 경험들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수용하고, 현재를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다음은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12월이 되면 누구나 하듯이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아. 나름 따뜻한 12월이네’라고 말한 순간 추위가 찾아왔다. 추위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이 반성의 시간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할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준다. 나 잘 산거 맞나? 매일 그랬듯이 어떻게 살아오기는 했는데 앞으로는 무얼 하면 될까?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겪은 일들과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로 인해 느꼈던 감정들은 모두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으로 변화한다.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하자.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으며, 이 순간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 지식을 연결하고 지휘하는 새로운 경험, 커맨드스페이스—